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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가는 IBM에 전격적으로 부임한 루 거스너가 고객 중심이라는 대전제 아래서 실행한 전략은 먼저 민첩하고 유연한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서 기업의 문화를 바꾸고 고비용 저효율의 시스템을 뜯어 고치기 위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조직의 구성원들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팀워크를 강조했다.

과거 IBM은 그야말로 미국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회사였다. 그리고 IBM은 그 사실에 대해서 뿌듯함을 느끼고 회사 안에서 끊임없이 일등주의와 엘리트 의식을 세뇌의 수준으로 교육시켰다. 이로 인해 생긴 저마다 자신감의 수준을 뛰어 넘어서 자만심이 팽배해지고 결국 회사보다 개인을 생각하는 스타의식에 젖어 버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는 세계 최고의 선수를 모아서 지구 방위대라는 별명까지 들었던 레알마드리드와 비슷하다. 레알마드리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한팀으로 불러들인다는 갈락티코 정책을 표방하면서 엄청난 돈을 쏟아 세계 최고의 선수들 지단,호나우두, 베컴 등을 불러 들였으나 우승은 커녕 성적이 과거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이는 포지션에 상관없이 무조건 최고의 선수들을 불러들였다는 점과 선수간의 팀워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와 대비되는 팀이 바로 첼시이다. 첼시도 레알마드리드 처럼 최고의 선수들을 불러들였지만 팀의 작전과 맞아 떨어지는 선수들을 스카우트 해왔다.

루 거스너 역시 사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최고의 팀워크를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를 위해서 그가 첫 번째로 움직인 것은 회사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IBM 순혈주의를 깨는 것이었다. 최고의 팀이 되려면  적당한 포지션에 적당한 사람을 채용하여서 팀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 분야마다 최고의 전문가를 투입시켜야 하는데 IBM은 정과 구습에 얽매여서 몇몇 자리는 논공행상식으로 사람들을 승진시켰다. 특히 홍보라던가 재정을 책임지는 중요한 자리 마저도 내부 승진을 위하여 비전문가들로 채워넣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IBM이 부족했던 전문분야에 대해서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전문가를 초빙했다. 그는 마케팅  담당자로는 아메리칸 익스 프레스에서 이사였던 애비 컨스탬(Abby Kohnstamm)을 데려왔고 재정책임자로는 크라이슬러에서 14년간 일하면서 도산위기의 회사를 정상으로 돌려놓은 제롬 요크를 고용했다.

그가 IBM이라는 깃발아래 직원들의 단결된 힘을 모으기 위해 노력한 것 가운데 하나가 직원들과 대화였다. 당시 IBM 직원들 사이에는  패배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이미 루 거스너가 오기전에 10만명이 해고 되었고 그 역시 강력한 구조조정이 예고되어 있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갖고 있었다. 성공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는 직원들을 직접만나서 대화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직원들을 직접 만나서 IBM의 부활시나리오들을 들려주었다. 처음 루 거스너의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직원들이 10명만 모여도 진지하게 토론을 하면서 과거의 경영자하고는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과거의 임원들은 직원들을 강당에 모아놓고서 연설하기를 좋아했다. 연단위에서 연설을 시작하면 부동자세로 경영자의 말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루 거스너는 강당에 걸터앉아서 사람들을 모아놓고서 대화를 나누었다. 소수의 직원들을 모아놓고서 기존의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의견을 직접 경청하기 까지 하였다. 루 거스너가 열정적으로 IBM의 부활을 외치는 모습이 마치 과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를 회당모임이라고 말하였다. 직접 직원들의 눈을 보고 그들의 의견을 듣는 회당 모임은  직원들이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힘을 합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는 직원들과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기 위해서 e-메일도 적극 활용했다. 그는 회사에서 중요한 정책을 시행하기전이나 의미있는 경험을 겪은 후에는 전세계의 직원들을 향해서 이메일을 보냈다. 그동안 IBM 직원은 거대한 조직인 덕분에 회사에서 중요한 정책이나 변화가 있을 때 그 소식을 회사로부터 직접 듣기보다는 언론을 통해서 먼저 듣는경우가 많았다. 루거스너는 회사에 대한 정보는 직원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면서 e-메일을 자주 이용했다.

e-메일은 직원들이 참여의식을 가지고 회사에 대한 의견을 표출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의사소통 기구가 되었다. 이는 직원과 사장 사이에 쌍방향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전의 사장으로부터 e-메일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직원들은 루 거스너의 메일을 받고 무척 감동했다.

한때 아마존에서는 유명 기업들의 직원들이 사가는 책을 분석해서 홈페이지에 공개했던 적이 있었다. 인텔에서는 리눅스 관련책이 많이 팔렸고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빌게이츠에 관한 책들이 많이 팔렸는데 아마존에서는 이런 사실들을 조사해 인터넷에 공개했다. IBM도 포함대상이었다. 루 거스너는 이에 대해서 IBM 직원들의 프라이버시가 공개된다는 사실이 우려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e-메일을 통해 직원들의 의견을 물어봤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아마존에서 IBM 직원들 상대로 무슨 책을 구입했는지 조사하는 것은 엄연히 사생활 침해이고 회사는 이에 대해서 항의해야한다고 e-메일을 보냈다. 이렇게 의견을 통합한 루 거스너는 아마존에 연락해 IBM 직원들이 구입하는 책을 조사하지도 말고 공개하지도 말라고 했다. 이렇듯 e-메일을 이용하여 직원들과 상호교류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의견을 내놓도록 하는 것은 팀워크를 강화하는데 역시 큰 도움을 주었다.

루 거스너가 팀워크를 강화하기 위해서 구사한 전술중에 하나가 바로 정치꾼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IBM은 군대처럼 잘 정비된 조직이었다. 상명하복의 엄격한 명령체계 덕분에 직장상사의 권위라는 것은 무시무시 했다. 그리고 임원정도가 되면 독자적인 예산을 편성할 수 있고 사람들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임원이라는 이름아래 자율권을 주면서 팀단위로 자유롭게 운영하도록한 제도들이 결국 최고위층과 직원들 사이를 너무 멀어지게 했다. 직원은 CEO인 루 거스너보다도 자신이 소속된 부서팀장을 더 두려워하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루 거스너는 먼저 임원들의 보좌관수를 줄였다. 회사에서 유능하다 싶은 사람들이 실무에서 일하기 보다는 임원들의 보좌관으로 들어가서 파워싸움에 동원되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부사장처럼 직무나 직책은 없고 직위만 있는 자리들을 대폭적으로 줄였다. 프로젝트의 리더들도 임원들중에서 뽑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을 직접적으로 진행하는 실무진을 위주로 선발했다. 그리고 또한 루 거스너의 이름을 팔아서 이야기를 꾸미는 사람에게 엄벌을 내렸다. 또한 루 거스너와 직원간에 이간질을 하는 임원들도 제거 대상이 되었는데 IBM의 유럽 지사장이 루거스너가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을 중간에서서 차단한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유럽지사장을 본사로 불러들여서 바로 불호령을 내리고 해고시켰다.

팀워크를 구축하기 위해서 그가 자주 써먹은 수법은 외부의 적을 강조해서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었다. 그는 회의 중에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 썬 마이크로 시스템즈의 맥닐리, 오라클의 래리 앨리슨의 실제 사진을 보여주면서 저들은 우리를 깔아 뭉개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우리는 가만히 있어서 안된다고 말했다. 이는 팀원들에게 공공의 적을 각인시킴으로써 증오심을 키우고 열정을 자극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적은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 있으면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내부의 단합된 힘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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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터앤미디어의

    tattermedia's me2DAY 2009/11/27 14:10 삭제

    망해가는 IBM에 부임한 루 거스너가 실행한 전략 중 하나. <회의 중에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 썬 마이크로 시스템즈의 맥닐리, 오라클의 래리 앨리슨의 실제 사진을 보여주면서 저들은 우리를 깔아 뭉개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우리는 가만히 있어서 안된다고 말했다.>

좋은 회사란 무릇 돈을 많이 버는 회사다. 그렇다면 위대한 회사란 무엇일까? 새로운 사업 분야를 개척해서 그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새로운 수익모델을 세웠다는 것이 중요하지 꼭 무엇을 발명하는 최초일 필요는 없다.  발명은 그 자체로써 큰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수익을 얻는 것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문제이다.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경영자라는 스티브 잡스도 사람들에게 가장 앞선 상품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최초는 아니었다. 리사에서 선보인 최초의 그래픽 기반의 운영체제는 사실 제록스의 연구소인인 PARC에서 구현된 컴퓨터를 보고서 상품으로 개발한 것이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역시 또 다른 차원이어서 그래픽 기반의 운영체제로 가장 많이 번돈을 사람은 다름아닌 빌게이츠였다.

 1. 최초가 아닌 성공적인 수익 모델을 만들어 냈다

게임의 경우 최초로 게임을 개발한 사람은 윌리엄 비긴보섬이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최초로 상업용으로 가정용 게임기를 판매한 랄프 베어 역시 게임이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는데 그 스스로가 확신 못한 사업인 만큼 판매량의 저조로 실패를 맛봤다. 결국 게임이라는 산업에서 영광을 맛본 사람은 놀런 부쉬넬이고 그는 게임 하나로 천만장자의 올랐고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라는 호칭까지 얻게 되었다. 발명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자기만족을 한다면 상관없는 이야기겠지만 회사란 무릇 사업적인 측면에서 평가를 해야 한다.

빌게이츠가 최초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사람은 아니어도 그가 개인용 컴퓨터를 위해서 소프트웨어를 판매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이렇듯 디지털 리더는 엄밀히 말해서 발명가라기보다는 혁신자이고 고객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업적인 가치로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스티브 잡스 역시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를 열었지만 그는 최초라기보다는 상업적인 성공시대를 연 사람이라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 리더들의 성공은 발명보다는 수익모델을 창조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마이클 델 역시 맞춤형 컴퓨터를 직접판매하는 수익모델을 고안했다. 세계최초로 메모리와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에 이바지한 앤디 그로브 역시 사업적인 성공모델을 만들었기에 성공한 디지털 리더로 평가받을 수 있는것이다. 루이스 거스너는 IBM을 회생시킨 훌륭한 경영자정도로 남을 수 있었지만 IT 컨설팅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정착시킴으로써 위대한 디지털 리더로 남게 되었다. 시가총액 경영을 선보인 손정의도 그렇고 게임으로도 돈을 벌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미야모토 시게루도 새로운 방식의 사업모델을 구축함으로써 세계최고의 디지털 리더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검색엔진을 래리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검색시장에 진출할때는 알타비스타, 라이코스, 야후, 익사이트등 너무 많은 업체들이 경쟁하는 레드오션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검색 엔진 기술에 혁신을 가함으로써 기존 경쟁자들을 이겨냈다. 구글이 증명한 수익모델은 검색은 포탈 사이트의 보조자적인 역할을 할뿐이라는 기존 선입관을 깨고 주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구글은 검색엔진의 품질이 최고가 되는 것 하나만으로도 돈을 벌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줌으로써 인터넷 업계에 새로운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구글은 검색 그자체로도 돈을 벌수 있다는 수익모델을 창조해냈고 이는 구글을 단순히 훌륭한 회사가 아니라 위대한 회사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위대한 기업이란 무릇 기존의 선입관을 깨고 새로운 수익모델을 만들어서 성공한다고 할 때 과연 여기서 성공이란 어느 정도를 뜻할까? 당연히 시장에서 1위를 기록하여야 할뿐만 아니라 그 사업분야의 대명사로 인정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복사기를 말할때는 제록스라고 말하는 것 과 같다.  디지털 리더들은 바로 그런 대명사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운영체제의 윈도(빌게이츠), MP3의 아이팟(스티브 잡스), CPU의 펜티엄(앤디 그로브), 맞춤형 컴퓨터의 델(마이클 델), IT 컨설팅의 IBM 글로벌서비스(루이스 거스너), 인터넷의 야후(손정의), 게임의 패미콤(미야모토 시게루)등을 뽑을 수 있다. 구글 역시 검색의 대명사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I Google it 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Google은 검색하다의 동사형으로까지 사용될 정도이니 그 분야의 1인자이자 대명사가 되어야 하는 위대한 기업의 조건은 충분하다.

 2. 그들만의 기업 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우리가 위대한 기업이라고 하는 업체에는 또 다른 두 번째 특징이 있다. 바로 그 직장만의 문화가 있어서 다른 업체에 파급효과를 주는 것이다. 대학 캠퍼스 분위기의 마이크로 소프트나 인텔의 평등문화 애플의 해적정신등은 대표적인 기업문화의 한 단면이다. 구글의 특징적인 기업문화는 놀이터 같은 즐거움이 넘치는 회사분위기이다. 구글의 본사건물인 구글 플렉스 안에는 각종 장난감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휴게실에는 게임기는 물론이고 마사지의자와 피아노등 직원들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물건 등을 갖춰져 있다. 그리고 차고에서 일을 할 때 몰래 냉장고를 훔쳐먹었던 서러운 경험을 겪었기 때문인지 회사의 냉장고는 신선한 과일과 주스가 꽉꽉 차있고 원하는 과자도 준비되어 있다.

특히 구글 플렉스에는 특급 요리사가 점심을 무료료 제공하고 있다. 구글이 제공하는 뛰어난 음식맛은 외부에도 잘 알려져 있는데 사업관계로 만나는 파트너들이 일부러 약속시간과 장소를  점심시간무렵에 구글 플렉스 사무실로 정할 정도이다.  구글 플렉스 안에는 최고의 목욕탕 시설과 마사지실 도 완비되어 있어서 피로를 풀기 위한 직원들에게 최고 인기이다. 또한 구글 플렉스 앞의 넓은 마당은 직원들끼리 단합을 위해서 하키와 같은 게임을 하는데 자주 이용된다.  롤러브레이드나 자전거도 직원들에게 인기아이템이다. 구글 플렉스 마당에서 래리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롤러브레이드로 운동하는 것은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일주일에 한번 전체 직원들이 공원을 함께 돌아보고 같이 간식을 먹으면서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도 구글만의 특징적인 문화이다. 구글에서는 애완견을 회사에 데려올 수도 있고 탁아소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진 곳에 맡길 수도 있다. 그밖에 세탁이나 세차도 무료고 통근버스는 최첨단 컴퓨터 시설을 갖추어 놓아서 버스를 타고 회사로 출근하는 시간도 업무시간으로 인정 해주는등 복리후생에서도 세밀한 배려가 돋보인다.  이와 같이 직원들이 아무 걱정없이 회사에서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구글은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구글이 이렇게 즐거운 놀이터 같은 회사를 추구하는 것은 직원들에게 그만큼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아이디어로 유행이 빠르게 바뀌는 곳이기 때문에 구글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변화에 민감하면서 항상 신선함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매일 똑 같은 업무를 반복하는 직원에게서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없다는 그들의 생각은 7:2:1 정책에서 잘 들어난다.  7:2:1은 직원들이 본업에 70%의 시간을 할애하고 20%는 업무이외에 회사와 관련된 자신만의 독자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10%는 회사의 사업분야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연구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덕분에 구글 직원은 주 5일중에 하루는 회사업무를 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가 있다.  7:2:1의 정책으로 탄생한 아아디어중에 하나가 구글 뉴스이다. 911사태직후에 미국에서는 과도한 접속량으로 각종 뉴스사이트가 불통이 되었다. 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갈증을 목격한 직원중에 한명이 구글을 통해서 뉴스를 검색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녀는 원래 담당했던 업무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하루가 주어지는 자유연구 시간에 구글 뉴스를 개발했다. 전세계 만곳이 넘는 뉴스사이트를  검색하도록 만든 구글 뉴스는 서비스가 개시되자 구글에서 서비스하는 콘텐츠중에서 최고 인기있는 사이트가 되었다.

 3.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창업주가 있다

위대한 기업에서 볼 수 있는 것중에 하나는 회사 창업자들의 인간적인 매력이다. 이는 세계 최고의 부자라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검소하고 소탈한 평소 생활태도와 자선사업으로 구체화된다. 빌게이츠는 명품 양복보다는 간편한 면바지에 낡은 스웨터 차림으로 대중 앞에 나선다. 또한 비행기를 탈때도 비싼 비즈니스석이 아니라 저렴함 이코노미석을 타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기업 회장이라고 하면 양옆에 경호원과 수행원들이 줄줄 따라다닐 것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그는 세계출장에도 홀홀단신의 몸으로 돌아다녔다. 빌게이츠의 불어나는 재산에 사람들이 시기심 어린 질문을 할 때면 그만큼 내가 나중에 자선사업에 기부할돈이 많아지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한 그는 빌앤 멜린다 자선재단을 세워서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하기로 하면서 존경받는 기업가로 거듭났다. 티셔츠의 청바지 차림으로 유명한 스티브 잡스 역시 검소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가 애플컴퓨터의 성공으로 1억 5천만달러를 벌었을 때 실리콘 밸리에 대저택을 구매한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대저택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고 오직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그 넓은 집안에 덩그러니 침대하나만 있는 사진은 스티브 잡스가 대중들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되는데 한몫 하였다.  스티브 잡스는 결혼 후에는 오히려 평범한 충산층들이 사는 작은집으로 이사를 갔고 세탁기 하나 고르는데는 아이들과 일주일을 넘게 고민할 정도의 소박함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디지털 리더는 부자지만 부자티를 내지말고 자선사업을 위해서 돈을 쓰는 공통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돈을 밝히기 보다는 일을 더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일 자체를 너무 사랑해서 휴가가는것보다 일하기를 더 좋아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마이클 델에게 왜 당신은 다른 부자들 처럼 요트를 타고 바다를 유람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마이클델은 요트 타는 일은 재미없다며서 10억달러의 회사를 운영하는게 훨씬 즐겁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이렇게 일 자체를 사랑하고 빠져있는 모습이야 말로 디지털 리더의 실제 모습이기도 하다.

구글의 래리페이지와 세르 게이 브린 역시 여타 다른 디지털 리더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100억달러가 넘는 재산가인 세르게이 브린은 결혼전까지 방 두개짜리 임대아파트에 살고있으며 도요타의 친환경 하이브리드 자동차인 프리어스를 타고 다니면서 검소함과 소탈한 성격을 보여준다.  또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항상 돈 때문이 아니라 일이 즐거워서 라는 말을 달고 다니며 산다. 이런 말들이 세계 최고의 갑부들이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래리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자신들이 일보다도 돈을 더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장 회사를 팔고 해변에서 휴가를 즐길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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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터앤미디어의

    tattermedia's me2DAY 2009/10/12 17:13 삭제

    위대한 IT기업의 3가지 조건. <1. 최초가 아닌 성공적인 수익 모델을 만들어 냈다>, <2. 그들만의 기업 문화를 만들어 냈다>, <3.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창업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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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델은 어린시절 전자계산기를 보고는 컴퓨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그는 각종 컴퓨터 부품을 판매하던 라디오 셰크 매장에 친구들과 자주 놀러갔다. 라디오 셰크는 라디오 키트나 거짓말 탐지기 같은 조립식 전자 부품에서 전자계산기와 컴퓨터 등을 판매하던 곳으로 당시 청소년들의 과학적인 호기심을 자극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던 상점이었다. 컴퓨터의 매력에 빠져던 마이클 델은 중학교 시절 중앙컴퓨터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단말기를 만지며 더욱 컴퓨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마이클델은 컴퓨터 실력도 뛰어났는데 학교의 출석관리 프로그램을 직접 작성해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애플 2 컴퓨터가 등장하자 마이클 델은 자신만의 컴퓨터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을 내게 되었다. 마이클 델은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애플 2 구입에 필요한 돈을 모았다. 하지만 애플 2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절차상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했다. 때문에 마이클 델은 부모님에게 애플 2를 사달라고 열심히 설득했고 마침내 15번 째 생일에 애플 2를 구입하게 된다. 애플 2가 우체국에 배달됐다는 소식을 들은 마이클 델은 즉시 부모님에게 떼를 써서 우체국까지 찾아가 물건을 받아올 정도로 강한 애착을 보였다.

마이클 델이 애플 2를 자기 방에 놓고 맨 먼저 한 일은 애플 2를 분해하는 일이었다. 그는 항상 사물의 원리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 컴퓨터 내부를 분해해서 컴퓨터 작동방식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데 애플 2를 분해 하던 중 마이클 델의 부모가 갑작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모님들은 거액을 들여서 산 컴퓨터가 단 몇 시간만에 분해된 모습을 보고는 마이클 델이 컴퓨터를 고장낸 줄 알고 마이클 델을 혼냈다. 하지만 이미 마이클 델은 수많은 책들을 읽으며 컴퓨터의 작동원리를 공부했기 때문에 애플2를 쉽게 원상 복구 시킬 수 있었다.

비록 마이클 델이 컴퓨터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10대를 보냈지만 정작 그는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기 위해서 택사스 대학에 진학한다. 마이클 델의 형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의학과를 다녔기 때문에 마이클 델 역시 의사가 뒤는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처음 대학생활을 잘 하는듯 싶었던 그는 다시 컴퓨터의 세계에 빠져든다.  마이클 델이 컴퓨터에 대한 실력이 출중한 것을 알고 있던 주변 사람들이 마이클 델에게 컴퓨터를 조립해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이클 델은 일반 컴퓨터보다 20~30%보다 싼 가격에 훨씬 성능좋은 컴퓨터를 조립해 주었다. 그러자 주변에 입소문이 돌면서 기숙사친구는 물론이고 교수님 그리고 동네의 변호사들까지 찾아와서 컴퓨터를 조립해 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마이클 델은 괘 큰 돈을 벌수 있었지만 자주 학교를 빠져야 했다.

마이클 델이 학업에 소홀하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들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마이클 델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않고 기습적으로 텍사스를 방문한다. 공항에 도착해서야 마이클 델에게 공항에 도착했다고 알려주었다. 마침 마이클 델은 기숙사방에서 컴퓨터를 조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전화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둘러 컴퓨터 부품들을 기숙사 곳곳에 숨기고 부모를 모시러 갔다. 마이클 델의 기숙사방에 들어서 부모님들은 금세 눈치를 채고 숨겨놓은 컴퓨터 부품들을 찾아냈다. 마이클 델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꼭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마이클 델이 컴퓨터나 조립하는 것에 진노했다. 그러자 마이클 델은 오히려 자기가 하는 일은 IBM을 이기려는 일이라고 대들었다. 허나 크게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고 하는 부모의 뜻대로 결국 마이클 델은 컴퓨터를 포기하고 공부에만 열중하기로 맹세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완전히 컴퓨터에 빠져있던 마이클 델은 결국 학교까지 중퇴하고 직접 컴퓨터 회사를 차려 버린다.

그가 이렇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컴퓨터 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만큼 컴퓨터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컴퓨터 매장에 들어오는 제품의 원가는 고작 700달러 밖에 안되지만 매장 주인은 2천 달러에 컴퓨터를 공급받고 이를 3천달러에 소비자들에게 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이클 델은 자신이 직접 더 싸고 더 빠른 컴퓨터를 만들고 싶었다. 그는 소비자들에게 더 싸고 좋은 컴퓨터를 팔기 위해서는 중간에 유통과정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봤다. 당시 컴퓨터 유통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컴퓨터 업체에서 신제품을 개발하여 판매를 하려고 해도 만약에 대리점에 재고가 남아있다면 함부로 출시도 할 수 없는 부작용이 있었다. 신제품이 시장에 나오면 기존의 컴퓨터는 팔리지 않기 때문에 상품개발을 완료하고도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재고가 소진될 동안 오랜시간 기다려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대리점을 해서 물건을 팔게 될 경우 생기는 다른 문제는 가격 통제를 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물건을 받은 대리점들은 급한 돈이 필요할 때 덤핑으로 물건을 팔았으므로 이런 식으로  가격 체계가 정확히 자리잡지 못하는 터라 소비자들의 불신도 커졌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3천 달러에 산 제품을 친구가 2천 달러에 샀다면 억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소비자들의 주문에 의해서 제품을 만들면 소비자 모두에게 동일한 가격으로 제품을 팔 수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원망을 덜 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여기서 틈새를 발견했고 그것이 자신에게 큰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중간의 유통과정을 생략하고 생산자가 바로 소비자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다이렉트 마케팅의 개념을 창안했다. 사실 누구나 이렇게 단순한 경영전략은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건 실행력에 의해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성공한 사업가들을 보면 무엇인가를 선택하기까지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오랜시간 동안 심사숙고를 하지만 한번 결정을 하면 바로 속도감 있게 일을 진행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 속에 좋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실천으로 옮겨가지 못한다. 사람의 성공과 실패는 결국 실행력에 달렸다. 마이클 델 스스로도 유통단계없이 직접 컴퓨터를 판매하겠다는 아이디어는 별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경영이란 적은 비용을 들여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싼값으로 고객에게 제공하는 일이기 때문에 유통단계를 없애는 직접 판매방식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라는 것이다. 결국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요소는 당초의 아이디어를 얼마나 정확하게 실천하고 실행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마이클 델은 1984년 5월 1천 달러의 자금을 가지고 텍사스주에 정식으로 회사를 등록 한 후부터는 정말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모든일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속도경영의 원천은 마이클 델이 이미 사업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쌓였기 때문에 생각하거나 고민하는 시간없이 현장에서 즉시 전략적인 활동을 바로 실행할 수 있었다. 과거 컴퓨터 유통에서는 마케팅에 대한 개념이 미약해서 수요와 공급이 명확하지 않았다. 매장에서 주문한 컴퓨터 대수 대로 공급이 되는게 아니라 항상 많거나 적었다. 문제는 매장에 컴퓨터가 너무 많이 공급되었을 때의 재고 문제였다. 그래서 마이클델은 컴퓨터 대리점들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공급이 초과되어서 팔리지 않은 재고로 남은 구형 컴퓨터들을 싼값에 즉시 구입했다.

이러한 전략은 그가 존경하는 샘월튼의 초기 전략과 유사하다. 월마트를 창업한 샘월튼도 주변상점을 돌아다니면서 재고들을 저가에 구입한 후 자신의 상점에서 판매를 했다. 그런데 마이클 델은 단순히 그냥 판매 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의 부품을 분해한 후에 소비자들이 원하는 컴퓨터로 다시 재조립하거나 업그레이드 해서 직접판매를 하며 많은 이득을 얻었다. 여기서 그는 뛰어난 정보력이 발휘됐다. 매장에서 대량으로 재고를 덤핑으로 넘길 때는 비밀리에 거래가 이루어져서 마치 암시장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바탕으로 1984년 18만달러 매출을 올렸고 85년에는 15배가 넘는 3천만 달러의 매출을 넘기더니 86년에는 다시 그 두 배인 6천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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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빌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이클 델


마이클 델은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이 세 명과 함께 대학 중퇴생의 성공신화로 언급되면서 자주 비교되는 사이다. 마이클 델이 컴퓨터 하드웨어에 치중됐다면 빌게이츠는 소프트웨어에 중점을 두고 있고 스티브 잡스는 양쪽에 걸쳐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 셋은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러면서도 협력관계를 맺고 지내야 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물론 겉으로는 좋은 친구사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마이클 델이 미국에서 1위의 컴퓨터 하드웨어 업체라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제품 대부분이 IBM-PC 호환 컴퓨터이기 때문에 윈도우를 탑재할 수 밖에 없는 관계로 빌게이츠와는 친밀하게 지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마이클 델은 윈도우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 운영체제 리눅스의 개발회사인 레드햇에 무려 1억 달러를 투자하였다. 또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애플이 자사의 매킨토시를 위해서 개발한 전용 운영체제인 맥 오에스(MacOs)를 델의 컴퓨터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라이센스를 해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한다. 물론 맥 오에스에 대한 극찬도 함께 덧붙여서 말이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또 그렇다고 마이클 델과 스티브 잡스가 친한 관계는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임시 CEO로 97년 복귀했을 때 이와 관련해서 기자들은 마이클 델에게 관련코멘트를 부탁했다. 그러자 애플은 어차피 곧 파산할텐데 그냥 회사의 문을 이번 기회에 닫고 남는 자산들을 팔아서 주주들에게 돌려주라고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애플이 실적적조로 언제 망할 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도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2006년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아이팟 판매의 실적호조 덕분에 주식이 상승하고 회사의 시가총액이 무려 721억 3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델의 시가총액인 719억 7000만달러를 넘어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티브 잡스가 그 동안 참고 참았던 응어리를 풀어냈다. 회사 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델보다 높은 주가를 기록한것에 자축하면서 델은 틀렸고 우리가 옳았다고 강조하였다.

이미 전장에서 이야기 하였다시피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역시 라이벌 의식이 대단하다. 빌게이츠는 왜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 업계에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그를 무시한적이 있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 역시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에는 아이디어가 없다면서 비아냥거렸다. 맥 오에스 10을 일컬어서 윈도우 비스타 2.0이라고 칭하며 빌게이츠의 속을 긁기도 하였다.

사실 중퇴생 3총사 마이클델과 빌게이츠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 단지 재산으로 생각하면 빌게이츠가 선두이고 그 다음은 마이클 델이다. 그런데 혁신성에서 따져가면 스티브 잡스가 두각을 나타내고 빌게이츠가 그 뒤를 쫓는 형국이다.  고효율 저비용을 이끌어 내야 하는 경영자의 능력으로 따져가면 마이클 델이 단연최고이다. 하지만 이들의 현재모습으로 게임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제 디지털 시대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컴퓨터기술에 의존했던 시대에서 콘텐츠에 기반한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시대로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들 3인은 디지털 제국의 각자 고유 영토에서 최고의 모습으로 몸집을 키어왔다.하지만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의 시대가 되면서 고유 영토가 없어지고  컨버전스 즉 각종 산업과 기술들이 합쳐지는 과정에 있다. 영역파괴의 시대인 지금부터는 마이클 델 과 빌게이츠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각자의 고유영역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엔터테인먼트라는 전장에서 정면 승부하는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결국 디지털 시대 2막에서의 경기 결과에 따라서 이들의 운명과 업적을 최종적으로 평가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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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이를 창업한 피에르 오미디야르(Pierre Omidyar)는 1967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존 홉킨스 대학교 연수를 오게 되자 함께 미국 워싱턴 DC로 이사온다. 보스턴에 있는 터프츠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공부한 그는 일을 구하기 위해서 실리콘 밸리로 이사를 온다. 그는 애플 컴퓨터의 관련회사인 클라리스(Claris)에서 프로그래밍을 담당했다. 그 후 컴퓨터의 입력도구로  펜을 사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었던 잉크 디벨롭먼트(Ink Development)라는 회사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는 터프츠대학교 당시부터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여자친구는 페즈(Pez)사에서 판매했던 사탕을 포장한 캔디통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였다. 마침 오미디야르는 인터넷을 통해서 새로운 사업을 하고 싶었다. 퇴근시간이후 집에서 매일같이 인터넷 공부를 하던 그는 여자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불현듯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여자친구처럼 일반상점에서 판매하는 물건이 아니라 희귀한 물품들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인터넷에 경매점을 열자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판매하거나 구매하고 싶은 물건을 인터넷상에 올리면 사람들이 경매방식으로 물건을 거래할 있도록 하는 서비스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러한 아름다운 창업스토리는 홍보담당자에 의해서 상당 부분 미화된 것 알려졌다고 하나 이에 대한 진위 여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

1995년 노동절날의 휴일을 이용해서 피에르 오미디야르는 옥션웹을 오픈한다. 사업에 대한 확신을 가질수 없었던 그는 아침에는 회사로 출근하고 밤에는 옥션웹에 매달렸다. 처음 옥션웹은 무료였다. 하지만 옥션웹은 이내 곧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도저히 인터넷 서버의 임대비용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거래가 실제 이루어진 사람들에 한해서 수수료를 받았다. 의도된 수익모델은 아니었지만 이게 바로 대박을 쳤다. 옥션웹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회사에서 다니는 월급보다 많아지자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전념한다.

1996년 첫번째 고용자로 스탠포드 대학의 MBA출신인 제프스콜을 영입한다. 회사는 벤치마크 캐피탈로부터 500만달러의 투자를 받음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벤치마크 캐피탈은 인맥을 동원해서 스타벅스의 CEO인 하워드 슐츠를 이사로 영입하고 디즈니와 하스브로에서 근무한 베테랑 경영자인 맥휘트먼을 회사의 CEO로 데려온다. 이렇게 유명인사와 능력있는 경영자를 영입하게 되자 이베이의 성장도 한층 가속도를 붙이며 야후와 아마존에 이은 인터넷 빅3로 각광을 받는다. 2008년 85억달러의 매출에 17억달러의 흑자를 달성한 이베이는 인터넷 산업에 완벽하게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창업자 피에르 오미디야르 역시 36억달러의 재산을 가진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베이의 성공은 사용자들간의 커뮤니티가 만들어낸 힘을 보여준 좋은 사례이다. 야후의 경우는 회사에서 수집한 정보를 제공해서 사용자를 끌어모은다음에 광고를 통해서 돈을 버는 소극적인 수익모델이다. 아마존의 경우는 사용자들에게 물건을 판매하는 적극적인 사업모델이지만 처음부터 판매자와 구매자가 정해진 일방적인 거래의 형태였다. 상점을 그대로 인터넷으로 옮긴 것이 바로 아마존이다. 하지만 이베이는 오직 인터넷에서만 가능한 수익모델을 만들어 내었다. 이베이에는 애초부터 판매자와 구매자가 결정되어있지 않다. 누구나 판매자가 될 수 있고 구매자가 될 수 있다. 이베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힘은 사용자들간의 민주적인 커뮤니티에 기반하고 있다.  운영자들은 이베이의 웹사이트에 기술적인 지원과  질서유지를 위해서 최소한의 관여를 할뿐이다. 이베이의 모든 활동은 결국 사용자들이 주도하고 사용자간의 교류가 가장 중요하다. 사용자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이베이의 위력은 사람들의 충성도를 높이고 이베이의 열혈팬들을 양산했다. 이베이의 사용자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인터넷에 접속해서 사람들이 거래하는 물건을 지켜보면서 하나의 공동체의식을 느끼는 커뮤니티이다. 이베이에서의 거래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시작이고 이들은 서로 끈끈한 정을 느끼고 있다.

이베이는 최근 각광받고 있는 웹 2.0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웹 1.0은 운영자와 사용자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웹 2.0은 사용자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웹사이트 대한 개방성과 접근성을 주어서 참여도를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베이의 경우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각종 툴을 사용하면 이베이 전용상점을 열수도 있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거래사이트를 제작할수 있을정도로 사용자들에게 여러 권한을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이베이의 시도는 웹 2.0 시대를 더욱 촉발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인터넷을 1막으로 구분하고 웹 2.0을 2막으로 본다면 이베이야 말로 그 무대의 첫 번째 관문을 연 회사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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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창업의 계기는 재미있게도 마이크로소프트와 비슷한 연유에서 시작된다. 파퓰러 일렉트로닉스에서 세계 최초의 소형 컴퓨터 알테어 8080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에 빌게이츠는 이에 맞는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해서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게 되었다면, 애플은 알테어 8080의 비싼 가격에 좌절한 스티브 워즈니악이 직접 개인용 컴퓨터를 제작하면서 시작된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자신이 만든 물건들을 홈브루 컴퓨터 클럽이라는 연구모임에서 자랑을 했다. 평소부터 스티브 워즈니악과 친분을 맺고 있었던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든 컴퓨터를 본 뒤 이를 사업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잡스와 달리 스티브 워즈니악은 사업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때마침 바이트숍에서 500달러에 50개의 컴퓨터를 구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이에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악에게 회사를 창업하자고 제안한다.

당시 HP에서 일을 하던 스티브 워즈니악은 안정된 일자리를 그만두고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의 부모는 평소 스티브 잡스를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에 함께 사업을 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누구던가?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기어이 이사를 가서 전학을 했던 사람이다. 스티브 잡스의 화려한 언변과 비전에 이끌린 스티브 워즈니악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평소 자신이 아끼던 HP의 공학용 계산기도 팔고 사업에 전격 합류한다. 스티브 잡스 역시 평소아끼던 자동차를 팔아서 사업자금을 마련한다. 그들의 첫번째 사업장은 스티브잡스 집의 차고였다. 스티브 잡스는 회사 이름을 애플이라고 정한다. 이는 그가 학생시절 사과농장에서 즐거웠던 추억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었다. 특히 그가 다녔던 게임회사인 아타리(Atari)보다도 앞서서 전호번호부에 기록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애플 컴퓨터는 분명 스티브 워즈니악의 작품이지만 스티브 잡스는 이를 실현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회사를 창업했고, 판매를 위한 거래처를 확보했다. 여기에 컴퓨터 제작에 들어가는 부품비가 부족해 스티브 잡스는 직접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까지 했다. 또한 부품 가게에서 싼값에 부품을 들여올 때도 잡스의 협상력이 발휘되었다. 그렇게 완성된 애플컴퓨터는 고작 200대 밖에 판매되지 않는다. 이에 스티브 잡스는 좀 더 혁신적인 컴퓨터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악에게 매니아들을 위한 컴퓨터가 아니라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컴퓨터를 개발하도록 설득한다. 애플 컴퓨터의 경우 소비자가 구입을 한다고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컴퓨터를 구입한 후에 이것저것 추가장치를 구입해서 소비자가 직접 조립을 해야 작동했다. 스티브 잡스는 그런 것이 애호가들에게는 쉬운 일이겠지만 일반 소비자들은 컴퓨터를 두렵게하는 요소라고 봤다. 또한 컴퓨터 뒷면에 납땜이나 배선이 보여서도 안되고 소음도 최소화하여한다고 강조했다.

스티브 워즈니악이 본격적으로 애플2 컴퓨터 개발에 매진할 때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진짜 회사로 만들기 위해서 뛰어다녔다. 우선 자신의 전 직장인 아타리의 사장 놀란 부쉬넬을 찾아가 투자를 부탁했다. 하지만 자금사정이 어려웠던 놀란 부쉬넬은 아타리의 투자자인 돈 밸런타인을 소개해준다. 스티브 잡스가 돈밸런타인을 찾아가자 돈밸런타인은 어떻게 이런 인간을 자신에게 소개시켜주냐며 놀란 부쉬넬에게 불쾌감을 표현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돈밸런타인을 계속 찾아가자 돈밸런타인은 스티브 잡스가 미치광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결국 스티브 잡스의 끈질긴 설득에 짜증이 난 돈밸런타인은 마이크 마큘라를 소개시켜준다. 마이크 마큘라는 인텔에서 마케터로 일했는데 인텔이 상장되자 스톡옵션으로 대박이 난 덕에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의 나이 비록 32살에 불과했지만 그는 은퇴를 한후  수영장 달린 거대 저택에서 편안하게 인생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는 돈밸런타인의 부탁을 받고 억지로 스티브 잡스의 차고를 방문하게 된다. 그는 개발중인 애플 2 컴퓨터를 보고서는 성공을 예감했고 그는 애플에 9만 1천달러를 투자하는 동시에 은행에서 25만달러를 투자 받는데 보증을 섰다. 인텔에서 마케터로 활약한 마이크 마쿨라는 그야말로 동아리 수준이었던 애플을 진짜 회사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회사의 사장으로 내셔널 세미컨덕터의 이사였던 마이클 스캇을 회사의 사장으로 영입하였으며 그 밖의 인재들을 데려왔다. 여기에 돈밸런타인과 아서록 그리고 록펠러 가문까지 투자자로 데려옴으로써 회사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였다.

한편 스티브 잡스는 일찍이 홍보의 중요성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당시 인텔의 대변인 역할을 하던 실리콘 밸리 최고의 홍보 전문가 레지스 메키너를 영입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레지스 메키너는 아무런 실적도 없는 애플에 관심이 없었다. 이에 스티브 잡스는 당신이 우리일을 맡기전까지는 매일 사무실을 방문할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결국 레지스 메키너는 결국 잡스에게 굴복할수 밖에 없었다. 애플과 함께 일하게된 레지스 메키너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파격적인 광고로 충성도 높은 고객들을 확보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애플이 컴퓨터 역사에 이루어 놓은 진정한 혁명의 시작은 1977년에 내놓은 애플2다.  전문가나 애호가가 아닌 일반 대중을 상대로 큰 성공을 거둔 애플2는 단순히 역사책의 한 줄에 기록되는 최초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개인용 컴퓨터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플 2의 처리속도는 1MHz에 램은 4KB이고 저장은 오디오 카세트 테이프로 하는 제품이었지만 가격은 1290달러나 되었다. 실질적으로 컴퓨터를 개발한 스티브 워즈니악은 비싼 가격 때문에 제품이 팔리지 않을 까봐 우려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는 폭발적이었는데 이는 텔레비전을 연결해서 컬러 모니터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플2는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를 해나가며 컴퓨터의 발전을 이끌어내었고 1992년까지 판매되었다.

애플 2의 성공 덕분에 많은 회사들이 개인용 컴퓨터에 관심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타리와 코모도어 그리고 라디오 셰크 등이 이때 즈음에 전격적으로 시장에 진출했다. 무엇보다도 이미 대형 컴퓨터 시장을 독점하며 컴퓨터 제국이라고 일컬어지는 IBM이 그렇게도 많은 무시를 했던 소형용 컴퓨터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

애플2가 컴퓨터 업계에 끼친 중요한 영향 중에 하나는 이른바 킬러소프트의 등장이다. 각 가정과 사무실에 애플이 놓이자 많은 사람들이 게임과 업무에 컴퓨터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프트웨어 시장의 가치를 꿰뚫어본 이런 프로그래머들이 등장했고 실제로 첫번째 스프레드 시트 프로그램인 비지캘크는 소프트라는 명성을 얻으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비지캘크의 성공은 많은 프로그래머들을 자극시켰고 애플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벤처기업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창업붐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치 현재 앱스토어가 생태계를 창조했듯이 애플2는 바로 그런 역할을 했다. 

지금 현재 최고의 IT 회사로 손꼽히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성장에도 역시 애플2의 성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애플2를 통해서 많은 소프트웨어를 판매했고 덕분에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애플2는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산업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가정용 컴퓨터가 하나의 떳떳한 산업으로 인정받게 만들었으며 수많은 실리콘 벨리 벤처신화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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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게이츠는 하버드 대학교보다도 더 비싼 학비를 자랑하는 레이드 사이드 학교를 다녔다. 레이드 사이드 학교의 어머니회에서는 바자회를 열어서 3천달러의 수익을 냈는데 이 돈으로 학생들을 위해 컴퓨터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학교에 설치된 컴퓨터를 보고 완전히 매료된 소년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빌게이츠다. 빌게이츠는 자신의 온 열정을 쏟아부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익힌다. 실력적으로도 학교에서 단연두각을 나타내는데 그보다 한단계 위의 실력을 보여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폴 알렌이었다. 폴 알렌 역시 빌게이츠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둘은 컴퓨터라는 공통된 화제를 통해서 급속도로 친해진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는 이용시간에 따라서 돈을 내는 종량제 방식이었다. 폴 알렌과 빌게이츠가 실습실에서 과도하게 컴퓨터를 이용하는 바람에 어머니회에서 확보한 자금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학교에서 컴퓨터를 이용할 수 없게 되자 빌 게이츠와 폴 알렌은 직접 컴퓨터 회사를 방문해서 버그를 찾아주는 조건으로 컴퓨터를 공짜로 이용하게 해달라고 했다. 컴퓨터 회사는 10대의 소년들이 다짜고짜 컴퓨터를 이용하게 해달라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었지만 빌게이츠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컴퓨터에 자신감을 얻은 빌게이츠는 자신의 실력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던 중 인포메이션 서비스라는 회사에서 직원들의 월급을 계산해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달라고 의뢰한다. 3개월 동안 개발한 끝에 1만달러의 수고비를 받은 빌게이츠는 자신의 실력에 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인텔의 CPU를 이용해 고속도로에 돌아가는 자동차의 숫자를 컴퓨터로 계산해내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2만달러에 판매한 것이다. 학교에서도 빌게이츠에게 수업시간표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했는데 이때 빌게이츠는 여학생으로만 이루어진 반을 구성한 후 남자는 자신 혼자만 출석하는 시간표를 만들면서 학창 시절을 즐겁게 지내기도 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아르바이트로만 이미 4년동안 다닐 대학교 학비를 모두 번 빌게이츠는 변호사인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에 하버드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빌게이츠는 학교생활에 흥미가 없었고 매일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포커를 즐겼다. 빌게이츠는 타고난 승부사 답게 포커게임에서도 항상 이겼는데 이때 딴 돈은 나중에 그가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는데 창업자금으로 쓰였다. 이때 포커게임에서 만난 친구가 현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인 스티브 발머였다.

빌 게이츠의 운명은 1975년 발행된 잡지인 파퓰러 일렉트로닉스로 변화된다. 폴 알렌은 길을 걷다가 우연히 세계 최초의 소형 컴퓨터가 탄생했따는 파퓰러 일렉트로닉스의 기사를 보고는 즉시 하버드 대학교의 빌 게이츠를 만나러 간다.  잡지를 보고 한 후 빌게이츠는 자신이 이제 본격적으로 컴퓨터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모든 가정의 집안 책상 위에는 컴퓨터가 놓이는 시대가 올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게 되면 컴퓨터 산업도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게 될것이고 수 많은 기회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빌게이츠는 바로 그런 시대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기대하시는 법조인의 바람도 포기하지 못한 채 대학은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세계 최초의 소형컴퓨터 알테어 8800이 등장하자 다른 사람에게 이런 기회를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빼앗길수 있다는 공포감이 엄숙해오자 빌게이츠는 과감하게 컴퓨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한다.
빌게이츠는 알테어 8800을 개발한 MITS에 전화를 걸어서 알테어 8800을 위한 베이직을 개발해주겠노라고 제안한다. 이미 MITS에는 미국전역에서 수많은 프로그래머들이 빌게이츠와 똑같은 제안을 했다. 그래서 MITS는 가장 먼저 베이직을 개발해온 사람에게 계약의 우선권을 주겠다고 한다. 이에 빌게이츠는 폴 알렌과 함께 대학의 컴퓨터 실습실에 들어가서는 베이직 개발에 들어간다. 그는 8주 동안 컴퓨터 실습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베이직 개발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폴 알렌이 MITS 본사가 있는 뉴멕시코로 날아가서 그들이 개발한 베이직을 보여준다. 처음 알테어 8800에서 실행할 때 폴알엔은 혹시나 오류가 날까봐 걱정했지만 놀랍게도 알테어 8800은 완벽하게 작동했고 결국 MITS와 베이직 공급계약을 맺는다.

이 때 빌게이츠는 MITS 근처의 여관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다. 현재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용어들은 매우 친숙했지만 빌게이츠가 회사를 창업할때만해도 소프트라고 하면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빌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창업하자 사람들은 작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로 알 정도였다. 사실 마이크로소프트라는 회사명은 빌게이츠가 얼마나 미래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컴퓨터하면 대형컴퓨터를 생각하던 시절에 소형컴퓨터의 시대를 예견했으며 컴퓨터를 구입하면 소프트웨어를 얹혀주는걸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에 빌게이츠는 소프트웨어만 따로 판매하는 새로운 수익모델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빌게이츠는 레이크 사이드 학교에서 같이 컴퓨터를 연구했던 친구들을 속속 합류시킴으로써 회사의 체계를 잡아간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창업 첫해에 10만불의 매출을 기록하고 다음해에는 20만불을 벌어들인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MITS의 더딘 생산 시스템에 불만이 많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MITS의 컴퓨터가 한대씩 팔릴때마다 로열티를 받았는데 문제는 MITS는 생각보다 작은 회사라서 폭증하는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의 생산시설을 갖추지 못했다. MITS의 더딘 생산 시설은 마이크로소프트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MITS가 아닌 다른 회사에서도 마이크로소프트의 베이직을 납품해달라고 하였지만 독점 공급 계약 항목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1977년 빌게이츠는 오랜 고심 끝에 계약서에 제시된 충실한 마케팅 이행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이유로MITS와의 계약 파기를 선언한다. 처음에 MITS는 이제 20대 초반인 빌게이츠가 소송을 걸자 노발대발하면서 화를 냈다.  MITS는 어린 빌게이츠를 얕잡아 봤지만 빌게이츠가 누구인가? 아버지가 시애틀에서 유명한 변호사였고 하버드대학교에서 법학과를 다녔던 사람이었다. 법정으로간 분쟁은 빌게이츠의 완승으로 결론이 난다. 사실 여기에도 빌게이츠의 뛰어난 법적지식이 한몫했다. 처음 계약서를 쓸 때만해도 계약 파기에 대한 내용은 없었지만 계약서를 면밀히 살펴보던 빌게이츠는 계약서 마지막에 MITS가 베이직 판매를 위한 마케팅에 최선을 다한다는 항목을 추가하였다. MITS는 아무렇지 않게 빌게이츠의 의견을 들어주었는데 이때 넣은 계약서 항목이 마이크로소프트를 MITS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빌게이츠가 MITS와의 계약을 파기한 결단 역시 절묘했다. 법정에서 승소를 하던 해에 마이크로소프트의 매출은 100만불이었지만, 이듬 해에는 무려 400만불의 매출을 기록했다. MITS와 계약을 청산한 빌게이츠는 뉴멕시코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고향인 시애틀로 회사를 옮기게 된다. 이 후 회사는 더욱 승승장구했고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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